지식전달 역할에서 벗어나 시대를 통찰하고 부조리에 침묵하지 않는 교사로 성장해야

전경원 교사

김구, 안창호, 한용운, 안중근, 함석헌, 류영모, 김교신…. 이들이 갖는 공통점은 무엇일까? 이름만 들어도 민족지도자이자 독립운동에 헌신했음이 머릿속에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이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공통분모는 교단에서 직접 학생들을 가르친 이 땅의 ‘교사’였다는 사실이다. 

백범 김구는 동산평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20여명의 아이들을 교단에서 직접 가르쳤다. 양산초등학교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안창호는 남녀공학이던 점진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지·덕·체를 가르치는 전인교육을 목표로 삼았고 친히 점진학교 교가를 작사했을 정도로 학교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다. 그 후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한다. 이 시절 교사 안창호는 엄한 스승인 동시에 자애로운 부모와 같은 역할을 맡아 어려운 학생을 정성껏 돕고 장학금 제도를 두어 가난한 학생들에겐 매달 식비와 학비를 보조해 주기도 했다. 또한 오산고등학교에서 남강 이승훈, 고당 조만식 등과 함께 후학 양성에 매진했다.

만해 한용운도 근대식 학교는 아니었지만 남문 리 서당에서 숙사(塾師)로 근무했다. 동몽(童蒙)을 가르치면서 나라의 현실에 대한 울분과 분노를 표현했다. 안중근은 진남포의 돈의초등학교와 야학 삼흥학교(三興學校)에서 교무(敎務)를 전담하며 교편을 잡았다. 그는 학교를 떠나며 이런 말을 남겼다. “도끼(형벌)가 내 앞에 있어도 인(仁)에 임하면 반드시 실천하고, 솥(형벌)이 내 뒤에 있어도 의(義)를 본다면 반드시 나아갈 것이다.(斧鉞在前 臨仁必踐 鼎鑊在後 見義必往)”

망국의 역사를 제대로 가르칠 수 없음을 괴로워 한 함석헌, 민족교육을 통해 비판정신을 길렀던 김교신 

함석헌은 오산중고등학교 재학 시절 도산 안창호, 남강 이승훈, 고당 조만식, 다석 류영모 등 당대 기라성과 같은 선생님들로부터 정신적 세례를 받는다. 특히 다석 류영모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게 된다. 함석헌은 오산중고등학교 시절을 이렇게 회상한다. “오산학교는 그때 민족운동, 문화운동, 신앙운동의 산불도가니였습니다. 그때 그 교육은 민족주의, 인도주의, 기독교 신앙이 한데 녹아든 정신 교육이었습니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함석헌은 모교인 오산고등학교로 부임하여 수신(修身)교과와 역시·지리 교과를 가르쳤다. 역사 교사 함석헌은 망국의 교사로 망국의 역사를 제대로 가르칠 수 없다는 괴로움 속에서도 40여 편 이상의 글을 썼다. 결국엔 일제가 요구했던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교직을 떠나게 된다. 

그런가하면 김교신은 1928년 봄부터 양정 중·고등학교에 근무했다. 그는 양정에서 농업, 박물, 지리 교과를 가르쳤다. 지리 수업을 인물과 역사 위주로 가르쳤다. 학생들에겐 ‘너는 조선인이다.’, ‘너는 조선인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식으로 조선인으로서 정체성을 심어주는 교육을 강조했다. 일본어만 사용할 것을 강요하며 감시했던 살벌하던 시기에도 우리말로 출석을 불렀다. 감시하던 일본군 앞에서도 우리말로 이름을 불렀는데, 학생들이 “예”라고 대답하자 일본군이 ‘하이’라고 답하라 화를 냈다. “이름은 고유명사이니 관계치 말라.”라며 응수했을 정도로 굽힐 줄 모르는 기상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민족 교육을 통해 일제의 책략에 넘어가지 않도록 비판정신을 고양시키는 교육에 소명을 다했다. 

1936년 당시 재학 중이던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도 교사 김교신의 공이 컸다. 베를린 올림픽 출전을 위한 예선 경기가 일본 도쿄에서 열렸는데, 당시 제자 손기정은 스승 김교신에게 다음과 같은 부탁을 한다. “선생님 얼굴이 보이도록 자동차를 일정한 거리로 앞서서 몰아주십시오.” 김교신의 얼굴을 보며 이를 악물고 힘을 내겠다는 제자의 간곡한 요청이었다. 제자 부탁대로 택시를 타고 앞서 가며 차창에 얼굴을 내밀고 제자 손기정을 응원했다. 식민지 조국의 억울함과 청년 손기정의 분노가 눈물을 머금고 흘러내렸다.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했다. 

지식전달·돌봄 업무 전문노동자로 인식되는 교사들

인공지능과 로봇이 머지않아 인간의 영역을 대체할 것이다. 얼마 전 신문보도를 보니 가까운 장래에 사라지게 될 직업군에 ‘교사’와 ‘의사’가 속해 있었다. 무엇에 근거하는지 충분히 짐작이 가는 기사였다. 오늘날 교사는 우리 사회에서 지식전달 전문노동자 내지 돌봄 업무 전문노동자 쯤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래서 그런 기능이야 인공지능과 로봇 기술의 발달로 몇 년 이내에 사라질 직업군으로 분류되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와 달랐던 그때 교사들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들은 어떻게 한 시대를 통찰하고 조망했을까? 아울러 어떻게 우리 민족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할 수 있었을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우리의 교원양성 시스템 전반을 대대적으로 개편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하는 의문마저 든다. 

‘지식전달을 업으로 삼는 전문노동자’ 내지 ‘돌봄 업무를 위주로 하는 전문노동자’에서 벗어나 ‘시대를 통찰하고 실천하며 비전을 제시하는 지성인’이자 ‘모순과 부조리에 침묵하지 않고 실천하며 행동하는 전문가 집단’을 길러내기 위한 과정으로 말이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교육이 교사에게 바라는 역할이자 사명일 게다. 그래야만 우리 교사가 존재하는 참된 이유가 되지 않을까? 

교사가 깨어나야 한다. 교사가 깨어날 수 있도록 제도와 문화가 혁신되어야 한다. 지식 전달의 기능을 넘어 올바른 가치와 태도에 대해 함께 토론하고 고민할 수 있는 학교가 되어야 우리 사회도 건강하고 희망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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