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지금보다 더 평등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지도이자 나침반 노릇을 한다

출처 :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한 시민원탁회의에 참석했을 때였다. 차별금지법을 주제로 한 테이블에 청소년 참가자 한 명과 함께 앉아 있었다. 나는 이 참가자 앞에서 차별금지법의 필요성 이야기를 먼저 꺼내기 망설여져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우리 사회의 법과 제도는 ‘청소년은 미숙한 존재’라는 전제 하에 성찰 없이 차별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참정권 연령을 한두 살 내리는 것조차 어려운 것을 보라)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는 것만으로 기존의 법과 제도가 자동으로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맴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소년 참가자는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머뭇거림이 없었다. 국가는 차별금지법 제정으로 평등이 가장 중요한 원칙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선언해야 한다, 거기에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 출발점에도 못 서는 사회가 어떻게 더 깊은 논의로 나아갈 수 있느냐고도 강조했다.

평등! 가슴 뛰지만 자칫 공허한 말에만 그칠 수 있는 이 이상(理想)을 실현하기 위해 전 세계 많은 나라들이 평등에 관한 기본법인 차별금지법을 만들어 시행하고 있다. 이런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지금보다 더 평등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지도이자 나침반 노릇을 한다.

차별금지법은 ‘차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판단기준을 제시하고, 차별을 효과적으로 시정할 수 있는 구제수단을 제공한다. 국가가 차별 예방과 평등 증진을 위해 장기적 목표 아래 일관성 있는 정책을 추진하도록 하는 여러 제도적 장치도 그 내용에 포함한다.

개별적 차별금지법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렵고 사람들이 복합적인 이유로 겪는 현실의 차별 문제를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는 점도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꼭 필요한 이유이다.

무엇보다 차별금지법의 가장 중요한 의의는 앞선 청소년 참가자의 말대로 평등에 관한 국가기본법을 만드는 것 그 자체에 있다. 차별금지법 제정은 평등을 기치로 사회의 모든 제도와 정책을 근본부터 점검하고 정렬하겠다는 국가 차원의 의지가 표현되는 중요한 이정표가 되기 때문이다.

독일이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해당하는 일반평등대우법을 제정하면서, 이 법은 무엇보다 ‘신호효과’를 추구하고 있다고 밝혔던 것도 같은 의미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10년이 넘도록 차별금지법을 제정하지 못하고 있다. ‘사회적 논란’ 때문이라고 말한다. ‘OOO에 대한 내용은 차별금지법에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과 주장이 그 논란의 내용이다. 그동안 OOO 자리에 가장 많이 들어갔던 이름은 성소수자, 이주민, 이슬람인, 임신·출산한 청소년 등이었다.

하지만 사회의 어떤 누군가는 법의 보호를 받을 자격이 없는 존재라는 주장이 하나의 ‘정당한 의견’으로 받아들여질 때, ‘사회구성원 모두가 평등한 사람으로서 함께 존엄하다’는 평등에 대한 약속은 깨어진다. 그 누구라도 목소리 크기에 따라 OOO에 포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반대의 ‘신호효과’다. 누군가의 반대가 있다면 인권과 평등이라는 가치도 꺾일 수 있으며, 어떤 사회구성원을 차별하거나 모욕하는 주장이 있어도 그건 어쩔 수 없으니 받아들여야 한다는 신호가 10년 넘게 우리 사회에 퍼져왔다. 그리고 그 신호효과가 지금 전국의 인권 조례를 폐지하고 각종 인권 법·제도·정책의 추진을 가로막는 힘으로 돌아오고 있다.

한국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이 가로막혀온 사태가 그저 하나의 법을 보류한 것이 아니라 차별과 불평등의 구조를 적극적으로 승인하고 더욱 공고히 만들어온 과정이었다는 인식이 높아지면서, 이 국면을 넘어 평등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모이고 있다.

작년 초 범시민사회 연대체인 차별금지법제정연대가 재출범하였고, 전북·대구경북·부산·광주·충남 등 전국 각지에서도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는 지역 연대체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평등에 관한 기본법 제정만으로 불평등이 모두 사라질 수는 없겠지만 차별적 주장들이 있다는 이유로 기본법 제정이라는 첫 걸음조차 떼지 못해서야 어떻게 평등한 사회로 나아가겠는가.

10년 넘게 정체되어 온 차별금지법 논의를 열고 우리 사회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것은 평등이라는 가치를 진심으로 믿고 그를 실현시키고자 하는 시민들의 힘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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