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수요일에 진료를 쉬고 있습니다. 의원에 내원하는 환자들분은 "수요일에 진료 쉬세요?"라고 하시거나, 혹은 "수요일에는 노시잖아요"라고 볼멘 소리도 하시지만, 사실 수요일에 쉬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대신 매주 수요일마다 왕진을 나갑니다. 

간단하게 왕진나가는 날은 청진기, 펜라이트, 설압자 정도만 챙겨서 나갑니다. 하지만 욕창을 관리하러 갈 때는 거의 수술도구를 챙겨가고, 주사를 놓거나 혈액검사를 하러 갈 때만 해도 짐이 많아집니다. 작게라도 진료실과 검사실을 옮겨 가야 하는 셈이니, 예전 의사선생님들의 왕진 가방이 왜 그렇게 크고 뚱뚱했는지 이해가 갑니다.

물론 큼지막한 가방을 들고 간다고 해도, 진료실에서만큼 진료를 해낼 수는 없습니다. 대개 의사 혼자 가고, 재료도 부족하고, 검사도 제한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왕진을 나가면 다른 게 보입니다. 환자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가족들이 보이고, 경제적인 상태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환자를 보는 저의 시선도 달라집니다. 진료실에서는 그 분의 '주호소(주소)'가 눈에 들어온다면, 집에서는 그 분의 생활 전반에 시선이 갑니다. 어떤 의사 선배님은 왕진 나가면 재활용 쓰레기통 뒤져서 술병부터 세신다니, 그 선배님의 왕진이 얼마나 굉장할지 상상이 갑니다. 

저는 왕진을 갈 때 서울시 공유자전거 따릉이를 타거나 걸어갑니다. 운전면허를 갓 따기도 했거니와, 주차난도 걱정이 되어서요. 왕진갈 때 쓰겠다며 전동퀵보드도 장만해 놓았는데, 아직은 익숙해지지 않아서인지 잘 안 타게 되네요. 그래도 좋은 점이 있습니다.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가면 환자가 살고 계시는 동네가 더 잘 보이거든요. 얼마나 가파른 오르막을 걸어야 집에 도착할 수 있는지도 보고, 집까지 가는 길에 싱싱한 식재료/생필품을 구할 수 있는 곳이 마땅히 있는지도 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왕진이 활발하지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왕진을 가봐야 받을 수 있는 진료비가 진료실에서 받는 것과 동일합니다. 그나마 환자와 협의하여 교통비를 실비로 약간 받을 수 있을 뿐, 방문간호나 가정간호보다도 진료비는 더 적게 나옵니다. 열심히 왕진을 다니면 하루종일 다녀도 고작 5~6집인데, 진찰료 1만원을 받아서는 의사도 먹고 살기 힘드니까요. (만약 저도 개인의원을 하다면 왕진은 꿈도 못 꾸지 않겠어요? 살림의원이 주민들이 돈을 모아서 만든 병원이라 이렇게 왕진 시늉이라도 내 봅니다.)

이웃나라인 일본만 해도 왕진이 시스템으로 자리잡혀 있서, 왕진만으로도 먹고 의사들이 있습니다. 하루에 8집 정도 왕진을 하고, 진료실을 따로 운영하지 않는 1인 의원들이 운영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왕진을 하는 의원들이 자리잡히면 불필요한 입원이 줄어들 수 있고, 저처럼 시간을 정해놓고 가는 게 아니라 정말 환자가 급할 때, 필요할 때 왕진이 이뤄질 수도 있습니다. 왕진(방문진료)이 안착되어야 말기 암환자도 집에서 통증관리를 할 수 있고, 병원에서 죽고 싶지 않은 분들이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생의 마지막 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지체장애가 있으신 분들이 장애인콜택시를 부르지 못해 병원에 오지 못하는 일도 줄어들 수 있습니다.

저는 레지던트나 의대 학생들이 살림의원에 실습을 나오면, 시간만 허락한다면 왕진에 꼭 데려가고 있는데, 학생들이 실습후기를 작성할 때 가장 많이 언급하는 것도 역시 왕진입니다. 의원에서 출발해서 마을 가게를 들러, 아는 주민들과 인사를 나누고, 오르막을 올라 땀을 훔치며 집에 들어갑니다. 고혈압/당뇨 교육도 하고, 무좀 상태도 봅니다. 소리를 잘 못 들으시는 것 같아 귀 안을 들여다보니 귀지가 가득 있어 기구를 넣어 살살 빼내기도 합니다. 다치신 곳은 없는지 살피고 근육위축이나 관절구축이 더 진행되지 않았는지도 살핍니다. 방 안의 가구배치도 보고, 볕이 잘 들어오는지도 봅니다.

왕진을 가야 의사도 더 많은 걸 배울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사시는지, 무얼 드시는지, 요즘 무슨 생각 하시는지... 우리가 서로 알아가야 할 건 아직도 참 많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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