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악한 상황에서 협동의 가치 빛났다

당초 10월 마지막 주로 예정했던 벼 수확을 논의 여러 사정을 고려해 1주일 앞당겼다. 
작년에도 그맘때 벼를 벴는데 중생종부터 만생종까지 모두 잘 여물었기에 한꺼번에 수확을 해도 전혀 문제가 없었고 벼도 잘 말라 작업이 수월했다. 올해도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논도 다르고 날씨도 달랐으니 상황도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논에 도착해 논바닥을 살폈다. 너무 젖어있었다. 빨간불 작동! 3주 전인 9월 말, 쓰러진 벼를 세우러 논에 갔다가 물꼬를 열어 물이 빠지도록 조치를 취하고는 왔다. 

그래도 3주 만에 다 말랐을지 내심 걱정은 되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디뎌보니 발이 쑥 빠졌다. 어려운 작업이 예상됐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볏널을 만들어 건조하기로 하고 목수에게 도움을 요청해 놓았는데 안 그랬다면 이후 상황이 더 암담했을 것이다.

논바닥에 이어 벼를 살폈다. 극만생종인 북흑조는 수확할 상태가 아니었다. 단단히 여물려면 시간이 더 필요해 보였다. 논에 있는 용정찰, 자광도, 다다조 등 나머지 3종만 베기로 했다. 논바닥이 걱정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인원은 많았다. 아이를 제하고 어른이 21명이니 200평 논에 그 정도면 충분했지만 논 상황이 너무 안 좋았다. 하지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조건이 나빠 일은 힘들고 고됐지만 모두가 힘을 합쳐 열심히 제 몫을 해내 예상보다 수월하게 잘 마쳤다. 

‘벼베는 날 물장화’에 멘붕

지난 8월 하순부터 11월 초까지 은평에서 ‘도시농업전문가과정’이 진행 중인데 그날은 실습교육의 일환으로 수강생들이 논을 찾아 벼베기를 했다. 물론 논지킴이들과 지역의 관심있는 사람들도 함께였다.

오후 2시를 전후해 전세버스와 승용차에 나눠 탄 이들이 논에 도착했다. 금개구리논이 처음인 사람, 모내기 때 왔던 사람, 지난 달 쓰러진 벼를 세웠던 사람, 한 달에 한번은 왔던 사람 등 논과 만난 경험이나 모인 경로가 다 달랐기에 간단하게 소개를 한 후 낫질요령을 숙지하고 물장화를 신었다. 벼 베는 날 물장화라니 어이가 없었지만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용정찰부터 베었다. 용정찰은 지난달 모두 쓰러져 몇 포기씩 묶어 세워 놓았다. 묶었던 끈부터 풀어내고 쓱쓱쓱 낫질을 시작했다. 땅이 질어 벼 이삭이 땅에 닿으면 안 되어서 베어낸 벼는 논 가 사면에 세웠다. 논둑이 너무 높아 늘 불편했었는데 그날은 도움이 되었다. 이래서 늘 나쁜 것만은 없나 보다. 

벼를 벨수록 논둑과 거리가 멀어져 자연스럽게 역할이 나뉘었다. 벼 베는 사람과 벼를 받아 논 가로 옮겨 세우는 사람. 분담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고 제법 손발이 잘 맞았다. 땅이 너무 질어 벼를 베는 사람도 힘들었지만 볏단을 들고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은 더 힘들었다. 
그렇게  힘을 합치니 전체 논의 1/4에 해당하는 용정찰을 베는 데 30분이 조금 넘는 시간만 걸렸을 뿐이었다. 

볏널 만들어 벼 건조

다음은 북흑조를 건너뛰고 다다조와 자광도를 차례로 베기로 했다. 다다조는 논의 초입에 있었기에 아이들도 체험을 했다. 

어른들의 도움을 받아 한두 포기씩 벼를 벤 아이들은 생태전문가 선생님과 함께 둠벙에서 수중생물도 관찰하고 논 주변에서 메뚜기나 사마귀 등을 찾아 뛰고 소리 지르며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이 떠난 논에서 어른들은 다시 열심히 낫질을 했다. 경쾌한 아이들의 소리를 배경으로 쓱쓱 벼를 베어나갔다. 누군가 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너무 좋다고 했다. 그 넓은 들판에서 아이들 웃는 소리는 그야말로 청량제가 되었다.

점점 논바닥이 드러나며 공간이 만들어지자, 볏널을 제작하기 위해 목재를 든 목수가 논으로 들어간다. 벼를 베던 몇 명의 농부도 그 작업에 동참했다. 

일단 벼베기를 끝낸 농부들은 잠시 새참을 먹으며 재충전하기로 했다. 벼를 베서 바닥에 펼쳐 놓는 게 가능했다면 모든 작업이 끝났을 텐데 볏널에 거는 작업을 해야 했기에 충전이 필요했다. 각자 준비한 간식과 막걸리, 두부김치와 떡 등이 농막에 펼쳐졌다. 발과 옷은 흙투성이었지만 새참은 꿀맛이었다. 

볏널이 완성되고 농부들 모두 다시 논으로 들어가 볏널을 빼곡히 채웠다. 큰 볏널을 만들었지만 그래도 부족해 나머지 벼는 논 가에 세웠다.

들판의 아이들은 한 폭의 그림

모든 작업이 끝났을 때 서녘 하늘은 붉게 물들어 있었고 황혼을 배경으로 뛰노는 아이들 모습은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대충 흙발을 씻어내고 모여 섰다. ‘집에 돌아가면 파스가 필요할 것 같다’는 얘기부터 ‘너무 귀한 경험이 감사했다,’ ‘모두가 힘을 합치니 어려운 상황도 힘들지 않았다’, ‘두부김치와 막걸리가 일품이었다’ 등의 얘기까지 4시간여의 작업을 함께 한 소감을 나누었다. 

그 쌀로 맛있는 밥 지어 먹는 자리에서 다시 얼굴을 볼 수 있기를 기원하며 도시민의 전혀 도시민스럽지 않았던 가을 오후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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