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마스크를 쓴 산책자들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지천에 있어도 평소에 가기가 쉽지 않았는데, 마침 모임이 서오릉에서 있었다. 그런데 날씨가 별로였다. 요즘 날씨는 ‘삼한사미(三寒四微)’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삼한사온(三寒四溫)에서 따온 신조어인데, 3일은 춥고 4일은 미세먼지가 심하다는 뜻이다. 요즘 날씨가 딱 그렇다. 이 날도 미세먼지가 ‘아주 나쁨’에서 ‘나쁨’을 가리켰다. 하얀 마스크를 쓰고 숲 속을 걸었다. 하얀 마스크를 쓴 산책자들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괴이한 풍경이다. 마스크와 숲이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어디 괴이한 게 이것뿐이랴. 우리 삶을 송두리째 흔들 엄청난 문제가 시시각각 우리를 옥죄어오고 있어도 우리는 천하태평이다. 기후변화 이야기다. 지난 10월 초 인천 송도에서 제48차 ‘기부현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 총회가 열렸다. 언론에서 크게 다루지 않았지만 중요한 논의를 했다고 한다. 내용은 이렇다. 산업혁명 직전의 지구 평균기온보다 1.5℃를 초과한다면 지구사회가 큰 파국을 면치 못할 것이므로 적어도 2030년까지는 탄소 배출량을 지금보다 45%까지 줄여야 하고, 2050년까지는 배출량을 제로로 만들어야 하며, 나아가 이미 배출된 탄소를 대기로부터 포집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구 평균기온 상승을 1.5℃를 초과하지 말자는 간곡한 요청은 과연 실현가능할까?

IPCC 당사국 총회는 2015년 12월 파리기후협정을 채택하면서 “산업화 이전 수준 대비 지구 평균기온 상승을 2℃보다 현저히 낮은 수준으로 유지 및 1.5℃까지 제한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선언한 바 있다. 그런데 그 정도로 파국을 막을 수 없다는 과학계의 근거 있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었다.

이런 연유로 논의되고 결정된 1.5℃를 초과하지 말자는 간곡한 요청은 과연 실현가능할까? 2015년 이후, 국가는 물론이고 어느 누구도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삶의 전환을 고민하고 행동하고 있지 않아 보이는데 이것이 도대체 가능하긴 한 걸까? 더구나 동시베리아 북극 대륙붕의 메탄하이드레이트에서 메탄 유출이 본격화될 가능성과 시베리아, 캐나다, 알래스카 지역에 주로 분포하는 영구동토층에서 메탄가스가 방출되는 시나리오가 정말로 현실이 된다면 일말의 노력도 의미 없게 될 형편인데 말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어느 분의 말처럼 전대미문의 비상시대에서 우리가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살기를 그래도 원한다면, 우리는 이제 너무 늦었다고, 해봐야 소용없는 일이라고, 체념에 빠지거나 자포자기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가을이면 갈색으로 변한 큰 잎을 가는 참나무, ‘갈참나무’

그나저나 숲 속으로 눈길을 돌리니 희뿌연 미세먼지를 뚫고 갈참나무가 빼곡하였다. 그리 희귀한 나무는 아니지만 집단으로 자라는 숲은 실로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갈참나무 나무껍질은 정갈하지 않다. 껍질이 조각조각 덕지덕지 일어나 벗겨질 태세다. 그런 모습에서 갈참이란 이름이 유래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건강이 나쁘면 얼굴이 푸석하고 버짐이 피어오르는 것처럼 이 나무도 외양을 보니 속된 표현으로 ‘맛이 갔다’고 하여 ‘맛이 곧 갈 참나무’란 뜻으로 갈참나무라고 했다는 것이다. 실은 가을이면 갈색으로 변한 큰 잎들이 정갈하게 떨어지는 모습이 독특해 가을이면 잎을 가는 참나무란 뜻으로 ‘갈참나무’라 했다는 것이 정설에 가깝다.

오래전부터 논농사를 지어온 어르신들은 산에 올라가 갈잎(참나무잎)을 모아다가 논에다 거름을 했던 경험을 구슬프게 이야기하신다. 비료가 충분하지 않았을 시절이니 나뭇잎으로 질소를 제공해주기 위해서였다. “산에 지게를 지고 왔다 갔다 하는데 하루에 열여섯 번까지 갔다 온 적이 있어. 나뭇가지를 통째로 꺾어다가 바짝 마르면 갈아엎어. 소에다가 가래를 매가지고 잡아당기면서 논을 가는데 그걸 하면 다리가 다 까지지. 흙 속에 있는 나뭇가지에 다리가 긁혀서 피가 줄줄 나고 진물 질질 나고 그 다음에 또 갈러 가는 거야. 그렇게 논농사를 지었는데 지금 젊은이들은 굶어 죽어도 못할 거야.” 팔당에서 유기농사를 짓고 계신 어느 어르신의 이야기다.

갈참나무를 비롯한 수많은 나무들이 미세먼지와 기후변화 위기의 최전선에서 고군분투 중

갈참나무는 크게 자라는 나무다. 20m이상도 자랄 수 있다. 여느 참나무처럼 가을이면 도토리가 달리고 먹을 수 있다. 상수리나무와는 달리 잎이 크고 넓적하다. 잎자루가 길어서 신갈나무하고도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서울시내 종묘나 궁궐 등 낮은 평지에는 갈참나무 등의 노거목이 상당 수 자라고 있다고 한다. 이걸 보면 서울시에는 한때 참나무류가 번성했던 시기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갈참나무는 다른 나무와 달리 거친 느낌이 있다. 아마도 거친 나무껍질과 커다란 잎 때문이리라. 그런 나무들이 보고 싶다면 짬을 내 서오릉을 걸어 보시기 바란다. 갈참나무를 만나면 잊지 말고 그들의 노고에 고맙다는 말도 건네주시면 좋겠다.

갈참나무를 비롯한 수많은 나무들이 미세먼지와 기후변화 위기의 최전선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미세먼지를 걸러내고 기후변화의 원인물질 중 하나인 이산화탄소를 끊임없이 흡수하면서 인간을 위해 기후변화, 미세먼지와 전투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갈참나무를 비롯한 숲 구성원들에게 매일 매일 고마운 마음을 전하며 하루를 시작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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