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서울 출신 사람들은 따로 고향이 없다고 표현합니다. 고향이라는 단어가 흔히 시골, 지방의 태어나고 자란 어떤 곳이라는 사회적 공감 때문인 듯합니다. 아무런 연고 없는 소백산 자락 시골로 사과 농사 지으러 내려와서 고향을 묻는 지역 분들께 “제 고향은 서울입니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 말은 듣는 이 에게, 또 가끔은 나에게도 ”그렇게 말하는 게 맞나?”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현재의 은평구가 대부분 경기도에 속해 있던 시절, 서대문구 홍은2동 산자락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고 초등학교 6년부터 함께한 은평구는 누가 뭐라 해도 제게는 고향인데 말입니다.

제 기억의 장소에 대해, 어린 시절의 기억에 대해 생각해 보니 저에겐 그 곳이 연신내입니다. 불광 2동으로 이사 온 초등학교 6년생이 연신내에서 버스를 타고 홍은초등학교로 등하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1년 남은 졸업까지는 그냥 그 학교로 다니겠다는 제 나름의 불편보다 우정을 선택한 큰 결정이 있었던 거죠.

지금은 응암역까지 포장(복개)되어 넓은 도로로 바뀌었지만 당시엔 불광 중학교 위 북한산 입구에서 시작된 물이 한강까지 연결되어 있는 하천이었죠.

제가 주로 다닌 연신내에서 불광2동 올라가는 길, 하천 양 옆으로 전통시장과 미도파슈퍼(현 롯데마트)가 있었지요. 저는 그 길이 재미있었습니다. 시장의 떠들썩함이, 시장 안에 들어가면 닭 잡는 곳, 생선 파는 곳, 어묵 오뎅 파는 곳, 순대와 막걸리 파는 좌판까지, 없는 게 없는 그 시장통 천변 길과 시장은 어린 제겐 별천지였습니다. 그 곳에선 가끔 원숭이 데리고 와서 반짝반짝 광약을 팔기도 하고 “애들은 가라”고 소리치면서도 실제로는 크게 상관 안 하던 약장수도 보았습니다.

지금이야 연신내를 기점으로 온갖 대형 상가와 점포들이 있지만 그 당시에는 미도파 슈퍼와 시장 외에는 별다른 점포들이 없던 시절이었죠. 대성고 방향으로 있던, 친구들과 함께 자주 가던 코스모스 국물 떡볶이집, 양지스포렉스 목욕탕 건물로 바뀐(지금은 또 재건축 중) 양지극장과 그 앞의 오락실, 붉으스레한 등불에 무언가 비밀스러운 분위기의 그 앞 골목들. 어린 시절의 소년에겐 무어든 호기심 있는 공간이었죠.

그렇게 어린 소년이 성장하는데 한 무대가 되어 준 공간이 저에겐 연신내였습니다. 초등학교 1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2년여 시간, 제게 집과 학교 외의 유일한 바깥 공간이었던 연신내 일대에서 그 소년은 청년으로 커 갔을 겁니다. 설익은 우정을, 혹은 풋사랑을, 어른이 되고픈 소년이 쓴 소주와 담배를 경험하며 치기와 외로움을 배운 곳, 그 곳이 연신내와 그 주변이었습니다.

결혼 후 강남, 분당에서 거주하며 생활하던 제가 다시 은평으로 돌아와 살자고 결정하게 된 건 아마도 그 시절 경험했던 시절에 대한 기억이 귀소본능처럼 작용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다 한때는 동네 이런저런 일을 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고, 결국 그 연장선에서 이리 글 쓰게 되기도 하구요.

지금은 멀리 영주에서 사과농사 지으며 살고 있지만 연신내로 상징되는 제 고향 은평에서 만났던 어린 시절의 친구들과 또 후에 성인으로 만난 친구들…….

이렇게 찬바람이 부는 계절엔 아득한 그리움이 더 커지고 저는 아궁이에 나무들을 더 넣어 방구들을 데웁니다. 나무처럼 주변을 따듯하게 만드는 사람들 사는 동네, 이 구들방의 온기를 그 친구들에게 전하며 글을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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