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너 어데서 왔나? 강원도에서 왔다

검은 황금으로 불리었던 석탄 산업이 막을 내리고, 나의 고향 <고한>도 현재는 퇴색 되어버렸다. 하지만 기억 속 그곳의 삶은 마치 사진첩처럼 남아있다. 시간 지나면 먼지만 쌓일 뿐 켜켜이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 나면 더욱 그때의 삶은 선명해진다. 산골이지만 우리 집은 동네에서는 넓은 부지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 어머니는 동네서 알아주는 수단가셨다. 텃새 강한 지역에 이사를 와서 정착함은 물론이고 적은 세금으로 국가 토지를 사용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아내셨다. 매년 읍사무소를 찾아가야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먹고 살기 위한 길이라면 이건 일도 아니라고 늘 말씀하셨다. 덕분에 우리 가족은 몇 십 년간 땅 부자처럼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집을 중심으로 우측은 배추밭, 정면은 옥수수 밭, 좌측은 감자와 고추밭이었다. 사실 이렇게 넓은 밭을 경작할 수 있었던 것은 가까이 함께 살고 있는 친척과 이웃의 도움이 컸다. 아래 고랑을 따라 내려가면 외할머니 댁이 있었고, 봉당으로 이어진 집에는 둘째이모네 가족이 살았다. 또 월세를 주었던 뒷건물에는 옥이이모라고 불렀던 이웃과 친구 윤희네가 함께 살았다. 이렇게 한 동네에 살다보니 힘든 일들을 보면 서로가 그냥 칠 수 없는 분위기였다. 

연중행사처럼 아궁이에 하루 종일 불을 지피는 날이 봄과 가을 두 번 있었다. 봄에는 일 년의 농사일들을 계획하기 위해, 가을에는 수확한 작물을 서로 나눠 먹기 위해 불을 지폈다. 마당에 숯 타는 냄새가 퍼지면 목에 뻣뻣이 힘이 잔뜩 들어가 마당을 누비던 장닭이 귀신 같이 냄새를 맡고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께서 통통하게 살이 오른 장닭을 잡는 날이기 때문이다. 툇마루에 앉아 된장에 감자를 찍어먹다가 솥뚜껑이 열리면 모두 일제히 한 곳만을 바라본다. 뽀얀 김 사이로 승천하는 백숙이 된 장닭을! 

아버지의 백숙은 집안의 단연 최고의 요리이었다. 산에서 캐고, 꺾고, 딴 약재가 들어간 백숙의 풍미는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요리였기 때문이다. 우리 집 뒷건물에는 관사(학교사옥)에 빈 곳이 없어 대기를 하며 사글세를 사는 중·고등학교 선생님들이 있었다. 백숙을 먹는 날은 어머니께서 선생님들을 초대해 몸보신을 시켜주시며 날이라도 잡은 듯 계획에 없던 학부모 상담을 하시기도 하셨다. 

한 장의 사진 안에서도 끝없는 스토리가 이어지듯 어린 시절 가족과 이웃들 간의 오가던 정은 여전히 가슴속 남아 타지에서도 삶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2. 서울살이, 동네(고향)를 찾다. 

서울을 올라 온지는 14년 되었다. 어린 시절을 그리워했던 것일까? 아이를 키우기 위해 2년 정도 고향 같은 곳을 찾았던 것 같다. 그리고 첫 살림을 종로구 누상동에 차렸다. 누상동은 지금 서촌, 세종마을로 사람들에게 더 많이 알려져 있는 곳이다. 인왕산 아래 자리 잡은 서촌은 고도 제한이 있어서 높은 건물이 없다. 나지막한 빌라들과 주택들 그리고 오래된 한옥이 대부분이며 좁은 골목길 사이로 내 놓은 아기자기한 소품과 화분들이 서울 같지 않은 정겨운 향수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낯설기만 했던 서울 생활이 정겨운 동네 분위기 속에서 점점 익숙해질 무렵, 구파발이 고향이라는 동네 언니를 따라 북한산 둘레길 산행에 올랐다. 지금은 북한산 둘레길이 정비가 꽤 잘 되어 있지만 10년 전만해도 내가 걸어가야 길이 되는 곳이 많았다. 그래서 어디를 거쳐서 돌고 돌았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산행을 마치고 도착한 곳은 불광동이었다. 가깝게 보이는 터널을 가리키며 “저 터널 넘어가 종로구야, 여긴 은평구고”라는 동네언니의 설명에 구기터널 넘어 미지의 땅으로만 알았던 은평이 더 이상 멀게 느껴지지도 않았고 미지의 땅도 아니었다. 그렇게 자주 은평을 오게 되었고, 지금은 제2의 서울살이를 은평에서 보내고 있다. 산행으로 만난 미지의 땅이 지금은 기회의 땅이 되었다.

#3. 동네에서 찾은 교육·먹거리·의료 그리고 공동체 

기회의 땅에서의 새로운 도전과 시작은 생각처럼 녹록치 않았다. 여전히 경력이 단절되지 않기 위해 밤을 새며 일을 했고 낮에는 아이들을 돌보아야했다. 일과 가정을 균형 있게 유지하려 노력했지만 척박한 관계와 환경 속에서 모든 것이 힘든 일이 되었다. 그럴 때마다 어린 시절 함께 지내던 친척들과 이웃들의 도움의 손길이 그리웠다. 그 시기 친하게 지내던 동생이 한 어린이집을 추천해 주었다. 나에게 딱 맞는 어린이집이라고 침이 마르게 그 곳을 소개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 보자는 심정으로 의문 반, 기대 반으로 그 곳을 찾아갔었고, 그렇게 공동육아 조합원이 되었다. 

믿고 맡기는 공동육아는 아이와 함께 자라는 어른들의 이야기가 더 많은 곳이었다. 지지고 볶아야 음식이 만들어지듯 이곳에서 사람들과의 얽히고설킨 관계와 속사정 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타지에서의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위로가 되었다. 육아를 함께하며 친분이 있던 엄마의 아이가 아토피로 고생을 해 좋은 먹거리 이야기를 나누다가 은평두레생협이라는 곳을 알게 되었고 조합원이 되었다. 그 후 동네 다른 유기농 먹거리 조합들에도 관심을 가지고 누구나 좋은 먹거리를 접할 수 있도록 참여하고 추천하게 되었다. 또 아이가 아플 때 바로 찾을 수 있는 동네병원을 찾다가 살림을 알게 되어 조합원이 되었다. 이렇게 은평 주민으로서의 경험은 자연스럽게 지역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그 후 '은평형 부모교육' 과정을 이수하고, 지역연계 소모임 사업 공모에 선정되어 지원금을 받았다. 그리고 소모임 <Good mother`s>를 구성해 소외계층 여학생들을 위한 위생용품을 제작하여 아동양육시설에 기부하는 활동을 이어왔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에 여러 사람의 손과 재능이 더해져서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나눔을 할 수 있었다. '우리'라는 신뢰는 '이웃'을 향한 배려가 되고, 이로써 '함께'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이웃 함께’라는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은 소모임 공동체 모두에게 기쁘고 보람 된 일이였으며, 지역사회에 한발 더 나아갈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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