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방학이 학교생활기록부와의 씨름으로 시작되었다. 학기 중에 집중해서 쓰기 어려운 내용들이 많아 방학 중 조용한 틈을 타 내용을 작성하고 있다. 방학이 반쯤 지났는데 나는 여태 하루에 한 번씩 원격업무시스템을 접속하고 몇 시간 집중해서 쓰다가 바닥난 에너지를 커피와 초콜릿으로 보충하는 일을 반복한다.

한동안 언론을 떠들썩하게 하고 사람들이 모이는 곳마다 주제로 등장했던 강남 모 여고의 시험지 유출 사건이나 최근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코디네이터가 어쩌고, 극상류층의 서울대 보내기 실태가 어쩌고 하는 새로운 얘깃거리를 만들어 준 텔레비전 드라마는 모두 학교생활기록부와 관련되어 있다.

나까지 보태어 학생부종합전형에 대해 논하며 주장을 덧대고 싶지는 않다. 게다가 강남에 있는 8학군도 아니고 특수목적고등학교나 자율형사립고도 아닌 일반 공립고등학교에 있는 나로서는 먼 세상 일 같기도 하다. 그렇다고 일반고등학교는 학교생활기록부에 관심이 없느냐고 묻는다면 관심이야 거기나 여기나 비슷할 거라고 생각한다. 다만, 관심은 있으나 신경 쓸 여유도 관련 지식도 넉넉하지 않고, 그렇게까지 해서 애들을 좋은 대학 보내는 게 과연 행복해지는 길인지 회의를 품은 학부모를 나는 더 많이 만났다.

학교생활기록부에는 교과성적뿐만 아니라 다양한 활동내용이 들어간다. 창의적 체험활동, 수상경력, 과목별 교과세부능력 및 특기사항, 독서활동상황,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 등이 주를 이룬다. 학생부종합전형은 이 모든 것을 종합하여 평가에 반영하는 전형이다.

내용이 제일 중요하지만 분량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보니 교사들은 주어진 글자 수를 채우려고 노력하게 마련이다. 왜 그래야 할까? 교사들에게도 불안함이 있다. 내가 조금이라도 애쓰면 아이의 대학이 달라질 수도 있을까? 내가 좀더 성의 있게 쓰는 게 아이의 장래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기부 소설’이라는 씁쓸한 말까지 생기기는 했으나 없는 걸 만들어 내거나 어설픈 걸 꾸며 내는 일을 하고 싶지는 않다. 어떤 학생은 진로희망사항에 ‘진로희망 없음’이라고 적어 놓았고, 내가 그 학생과 상담하는 동안 들은 내용은 ‘아직 잘 모르겠어요.’였다. 진로희망사항이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학생의 상태는 ‘아직 고민중’인데 억지로 짜내고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지난 해와 마찬가지로 올해도 그 학생의 진로희망사항은 ‘진로희망 없음’이다. 

동아리활동에는 정규 동아리와 자율 동아리가 들어가는데, 자율 동아리는 대부분 진로와 관련 있는 동아리를 자율적으로 구성해 지속적으로 활동한다. 봉사활동을 하겠다고 계획서를 제출했는데 실제 활동내용은 함께 모여서 내신성적 대비공부를 했다는 학생들이 있었다. 덕분에 내신성적은 올랐지만 이에 대한 특기사항을 써 줄 수는 없었다. 동아리활동의 목적은 지켜져야 하는데 특기사항을 쓰려면 나는 거짓말을 해야 했고, 그것은 교육적으로도 옳지 않다.

요즘 나는 우리 반 학생들의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을 쓰고 있다. 품이 제일 많이 드는 작업으로 한 명, 한 명 스캔하듯이 떠올리고 말과 행동을 기억 속에서 불러들이면서 내용을 쓴다. 1년간 그 아이의 행동, 말, 학습태도, 단체활동시의 참여도, 남을 배려하는 정도, 타인과 협조하는 태도, 교우관계 등 인성, 학습, 예체능과 관련된 전면을 다루는 항목으로 학생에 대한 일종의 추천서 또는 지도자료의 역할을 한다.

그간 간간히 써 놓은 누가기록과 교무수첩을 참조로 하고 학생과의 상담내용을 떠올리며 쓰는데, 한 줄 쓰기가 버거운 경우도 있고 장점 찾기가 어려운 경우도 있어 울적한 마음이 몇 차례 지나갔다.

A는 수업시간에 자주 화장실에 가서 분위기를 깨고 때로 허락 없이 교실을 돌아다니며 짝과 얘기하다가 지적을 자주 받고 목소리가 커서 주의를 끄는 학생이다. 가끔 교과 담당교사와 갈등을 빚어 지도가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선생님도 있었고, 친하지 않은 학생들은 산만하고 소란스러운 행동에 대해 불편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본 그 학생의 장점은 일단 신뢰하게 되면 애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협조한다는 것이다. 드세고 날카로워 보여 타인과 잘 지내지 못할 것 같지만 소탈하고 솔직한 데다가 학급에서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는 학생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주목을 받게 해서 수동적인 아이들을 수업에 참여시켰다.

B는 학습의지가 상당히 높아 성적이 점차 올랐다. 학생의 어머니와 상담한 적이 있는데 모르는 수학문제를 아예 통째로 외운다고도 했다. 성취욕이 강하고 목표의식도 분명하며 경쟁심이 많아 라이벌로 삼은 아이를 이겨 보겠노라고 다짐하더니 2학기에는 정말 뛰어넘었다. 리더십이 있어 학급 행사에서 주도적인 활동을 하는 모습은 단연 돋보였다. 그러나 타인에 대해 무관심하고 학급에서 소외된 학생들에게 단 한 번도 눈길을 준 적이 없으며 학교 규칙을 적당히, 요령껏 어기는 일을 반복했다.

교사는 학생의 다양한 행동을 보며 장점과 단점을 종합적으로 평가한다.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은 말 그대로 ‘의견’이다 보니 어디까지를 유효하다고 봐야 할지 고민되는 지점이 있다. 게다가 혹여 단점을 적어 학생에게 불이익이 될까 봐 전전긍긍하고 결국 소심하게 ‘진심’을 감추기도 한다. 그래서 점점 객관적인 사실을 근거로 쓰려는 경향이 있고 이는 교육청에서도 권장하는 바이다.

나는 긍정적인 변화가 생긴 것을 보다 많이 쓰고 다소 보완했으면 하는 지점도 되도록 언급하고자 했다. 교사는 행동보다 말을 앞세우고 자신의 문제는 들여다보지 않고 남의 약점을 드러내는 데 좀더 강한 학생에게 ‘언변이 좋음.’이라는 표현을 쓰거나 소란스럽고 산만하며 수업과 관련없는 농담을 잘하는 학생에게 ‘밝고 활발하며 사교적인 학생’이라고 에둘러 표현하기도 한다. 교사들이 쓰는 학교생활기록부의 용어를 입학사정관은 알고 있다는 후문을 들은 적이 있는데, 교수들도 고등학교 교사들의 생기부에 대한 소심증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모두 학교생활기록부가 대학입시의 중요한 자료가 되다 보니 일어난 일이다.

가끔은 예전 고등학교 선생님의 한 줄 평이 가장 날카롭고 정확했다는 생각이 든다. ‘학습능력이 뛰어나고 잠재력이 많으나 수업태도가 산만함.’이라는 한 줄 평이 함축했던 많은 의미를 요즘 교사들은 1500자로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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